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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알베르 카뮈 이방인 : 죽음 세 단계 소설 분석 <1>

북리뷰

by 연우23 2023. 1. 10.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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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방인’ 내용 분석


카뮈는 이방인을 소설이 아닌 ‘이야기’로 분류한다. 이 점은 전통적인 소설이 가지는 가공적인 성격을 될 수 있는 대로 배제하면서 작품에 보다 더 현실성과 객관성을 부여하려는 작가 자신의 세심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무명작가에 지나지 않던 카뮈는 비교적 짤막한 이 작품을 발표하는 것과 동시에 일약 현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의 서열에 들게 된다. 그러나 한편, 간결한 문체로 다루어진 그 낯선 특이한 주제는 전통적인 소설의 개념에 익숙해 있던 당시의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그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1) 이방인에 나타난 죽음의 세 단계


일인칭 소설인 이 작품은 느닷없이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바로 그뒤 한 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주인공 뫼르소는 해수욕장에서 아무런 원한도 없는 낯모르는 아랍인들 우연히 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한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서 처형을 당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사람의 모습을 일기투의 형식을 빌어 고전적인 간결한 문체로 서술한다. 뫼르소는 예심과 재판과정을 통하여 ‘태양 때문에’ 살인을 하였다고 거듭 주장한다. 그는 다른 범죄자들처럼 거짓변명을 늘어놓으면서 판결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내려고 하지않는다. 오히려 터무니없어 보이는 살인의 이유를 그는 끝까지 고집스럽게 내세운다. 그리고 그는 끝내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가 밝히는 아랍인 살해이유와 처형을 당하기까지의 그의 자세는 상식의 한계를 벗어난다.


이 작품은 어머니의 죽음, 살인행위 그리고 처형이라는 세 단계의 죽음의 틀로 구성된다.이 죽음의 각 단계는 표면적으로 얼핏 보아서는 어떤 경우에는 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듯이 보이는가 하면 또 어떤 경우에는 불가분의 필연적 인과관계로 맺어진 듯이 보인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 뒤 잇달아 일어나게 되는 살인행위나 처형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며, 뫼르소의 살인 행위와 그가 처형을 당하는 것과는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어머니의 죽음은 겉보기와는 달리 미묘하게 작용하여 그다음 단계의 죽음들을 일으키게 하면서 죽음의 각 단계를 표면적인 것과는 다른 은밀하고 유기적인 인관관계로 서로 얽히게 만든다. 하나의 죽음은 다른 죽음을 부르고 그 다른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을 일어나게 한다. 뫼르소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끝가지 지키면서 그것에 성실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성실성은 그를 죽음으로 이끌어간다.

 

 

2) 뫼르소의 반윤리적 태도


뫼르소는 아랍인을 살해하고 감옥에 갇힌다. 그 감옥 속에서 그는 예심을 거쳐 재판을 받게 된다. 그를 심문하는 예심을 맡은 판사는 그 과정에서 그의 살인행위가 아니라 그의 인물 됨됨이에 오히려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예심은 열한 달 동안 계속된다. 이러한 재판이 진행되면서 뫼르소의 인간성에 대해서 두 가지의 극히 대조적인 의견이 제시된다. 그의 친구들인 레몽과 마송, 그리고 그의 단골식당 주인인 셀레스트와 같은 그의 주변 인물들은 그를 ‘사나이’, ‘성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 ‘순진무구한 사람’이라고 지칭하면서 평소 그가 성실한 인간임을 증언한다. 반면에 그의 어머니가 묵고 있던 양로원 사람들은 주로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 죽음과 관련된 그의 반윤리적인 모습을 증언한다. 그들은 그가 장례 때 단 한번도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시신 앞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담배를 피운 일, 태평스럽게 잠들어버린 일, 어머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기를 거절한 일 그리고 평소 어머니를 만나러 온 적이 없다든가 어머니의 나이를 모르는 점 등 어머니에 대하여 끝까지 무관심하고 냉담했던 그의 도 다른 모습을 진술한다. 그의 여자친구 마리는 그를 처음 만난 것이 장례 바로 다음날 해수욕장이라는 것 그리고 그 날 저녁 함께 희극영화를 보고 잠자리를 같이 한 일등을 아무런 악의 없이 진술한다. 이 두 의견 가운데서 재판 때 설득력을 발휘한 것은 후자의 의견이다. 이러한 뫼르소의 반윤리적인 자세는 그의 반기독교적인 자세-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자세는 탈종교적이라 하겠다-와 결부되면서 그에게 사형이라는 극형을 내리게 하는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첫 신문에서 예심판사는 그에게 하
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한다. 예심판사는 그도 다른 범죄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관용과 자비를 빌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예심판사의 예상과 기대는 어긋나버린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다른 죄수들의 경우와는 달리 이번에는 입장이 뒤바뀌어 예심판사가 십자가를 그의 면전에서 흔들어 보이면서 강압적으로
그를 하나님의 품으로 안내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한다. 그러나 뫼르소는 단호하게 이를 거부해버린다. 그는 자신에게 유리할 수 있는 길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고집스럽게 자신의 진실에만 의존하려고 든다.


다른 범죄자들이 모두 그렇게 하듯이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행동을 진실로 뉘우치거나 혹은 뉘우치는 시늉만 하였더라면 그리고 은총과 자비를 빌었더라면 그는 결코 극형인 사형을 선고 받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한 집단과 같은 일원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다.


뫼르소의 변호사는 선고공판에서 그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것 대문에 고소를 당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을 죽인 것 대문에 고소를 당한 것인지’ 명확하게 해 줄 것을 예심판사에게 요구한다. 예심판사는 단호하게 ‘범죄인의 마음을 가지고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것’으로 그를 고발한다. 즉, 아랍인을 살해했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는 그가 속해 있는 사회와 그 구성원으로부터 영원히 추방을 당한 셈이다. 또한 뫼르소는 살인을 하고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면서도 도대체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식이 전혀 없다. 또한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거나 뉘우치는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가 다름 범죄자들과 같은 부류의 범죄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3) 뫼르소의 자유에 대한 의지


아랍인 살해라는 우연한 한 사건은 이 작품을 시간적․공간적으로 양문하면서 뫼르소의 판이하게 다른 두 가지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감옥의 높은 담벼락은 어느 날 갑자기 바다와 태양과 모래가 형성하는 밝고 개방적인 풍경 속에서의 자유분방한 그의 육체적․감각적 사람을 빼앗아버린다. 그리고 쇠창살로 둘러싸인 제한된 공간은 그에게 본능적 욕구를 억제해야만 하고 무료하게 시간을 메워야 할 사람을 강제한다. 감옥에 갇힌 초기 그는 타고난 성격때문에 큰 고통과 갈등을 겪게 된다. 또한, 스스로를 ‘자유스러운 인간’으로 생각하는 그의 습관적인 자세는 상승작용을 하면서 그의 고통과 갈등을 더욱 더하게 만든다.


그는 천성적으로 육체적인 욕구를 자제할 줄 모른다. 육체적안 욕구는 그의 감정을 흐트려 놓는다. 그는 때와 장소 그리고 사회적인 관습 따위는 전혀 개의하지 않고서 육체가 요구하는 대로 자유스럽게 행동한다. 장례식 때의 담배, 커피, 잠과 그리고 그 뒤 마리와 관련된 그의 행동은 이를 단적으로 증언한다. 감옥은 그에게서 욕구충족의 수단을 제거해버린다. 해방과 자유를 주는 바다와 태양으로부터 그를 격리시키는가 하면 담배, 여자, 수면과 같은 자질구레한 욕구의 수단도 빼앗아버린
다. 거의 동물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잠을 많이 잔다. 그러나 일단 감옥에 갇힌 뒤부터 그는 밤낮 할 것 없이 잠을 이루지 못한다. 더욱 그를 괴롭히는 것은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담배가 피우고 싶어 미칠 지경에 이르면 그는 침대의 널빤지 조각을 뜯어서 빨기까지 한다. 끊임없는 구역질이 그를 괴롭힌다. 가장 그를 괴롭히는 것은 여자에 대한 욕망이다.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그의 생각은 그의 갈등을 더욱 더 심화시킨다. 그는 감옥에 갇힌 뒤 얼마동안 갇혀 있다는 생각을 전혀 가지지 못한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걸핏하면 바다를 생각하고, 그 바다 속에서 헤엄치려는 생각을 가지곤 한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생각을 가지면 가질수록 감옥의 창살은 더욱 더 그를 옭죄어온다.


그는 감옥이 어떠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곳이지 모르고 있다. 그는 압수해 간 그의 담배를 돌려 줄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여자와의 자유스러운 육체관계를 금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변한다. 그에게 감옥의 의미를 가르쳐 준 것은 그 감옥의 간수장이다. 어느 날 그의 항의를 받은 간수장은 바로 그 자유를 빼앗는 것이 감옥의 기능이라고 그에게 가르쳐 준다. 나는 그에게,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이며 그런 대우는 부당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신들을 감옥에 가두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오”하고 그는 말했다. “아니, 그 때문이라니?” “아무렴, 자유라는 게 바로 그런거라구요. 당신들에게서 그 자유를 빼앗는 거란 말이오” 나는 한 도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동의를 표시하며 “참 그렇긴 해. 그렇지 않다면 징벌이라는 게 어디 있겠소?”하고 말했다. “그래요. 당신은 참 이 해성이 많군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해요. 그렇지만 결국 그네들도 스스로 요구를 채우게 된답니다” 그러고 나서 간수는 가버렸다. (p.107, <책세상>)


시간의 흐름 그리고 그의 노력은 그를 폐쇄적인 공간속에서의 부자유스러운 사람에 조금씩 익숙하게 만든다. 그는 점점 스스로가 자유스러운 인간이라는 생각을 잃어가게 되고 마침내 스스로를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 으로 의식하기에 이른다. 그는 그를 괴롭히고 갈등을 일으키던 욕구가 억제된 삶에 익숙해지면서 그 욕구 자체로부터 해방이 되고 새로운 자유를 얻는다. 동시에 형벌로서 그에게 강요된 욕구의 억제는 형벌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다시 잠도 잘 수 있게 되었으며, 감옥 속에서의 부자유스러운 삶 그 자체가 그 이전의 알제리에서의 자유스러운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의 일상적인 사람의 한 모습이 된다. 그는 그 삶이 예전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행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4) 새벽과 상고의 시간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고 난 뒤 그는 늘 두 가지의 생각에 사로잡혀 괴로워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새벽’과 ‘상고’와 관련된 일이다. 새벽은 죽음을 집행하는 사형집행인이 오는 시각이다. 상고는 죽음을 피하여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사형선고는 그로 하여금 그때까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유한한 자아’를 각성시킨다. 그는 바다와 태양 속에서 잚은 육체의 자유분방한 삶의 이면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유한한 자아의 각성은 동시에 ‘영원한 자아’에 대한 갈망을 생기게 한다.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은 바로 이 두 자아의 끊임없는 분열이다.

 

뫼르소는 새벽과 상고라는 두 문제를 더욱 더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검토함으로서 갈등을 해소하려 한다. 문제를 접근하는 그의 기본적인 자세는 실증적이며, 탈종교적이다. 그는 예심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역시 기독교의 하나님과 관련되는 내세나 구원 같은 것 들을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그래서 그의 죽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그는 그를 회개시키려는 형무소 부속사제의 노력을 죽음의 순간까지 거부해버린다. 새벽은 그에게 자신의 죽음의 수학적인 확실성을 의미한다. 그 죽음의 새벽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어도 언젠가는 어김없이 누구에게나 다가간다. 상고는 그것이 받아드려졌을 경우 그 새벽을 연기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20년이라는 긴 시간일 수도 있다.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바로 더 살 수 있는 그 20년에 대한 안타까운 미련이다. 그러나 그는 다음 순간 20년 뒤 또 다시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지금과 꼭 같은 고뇌에 사로잡히게 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 순간 그는 죽음의 방법이나 시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는 상고를 완전히 포기한다. 그의 이러한 상고의 포기가 생명의 시간적인 가치를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는 허무적인 자세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불확실한 영원한 자아의 거부이며,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유한한 자아 즉, 죽음의 적극적인 가치를 거부한다. 그는 미래라는 불확실한 희망이나 그것에 대한 연연한 미련도 가지지 않는다. 그에게는 오직 살아있는 현재의 순간만이 가장 귀중한 값을 가진다. 그는 상고의 포기와 동시에 더욱 더 깊게 이 세계에 뿌리를 박는다. 그 포기는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 속에서만 가능한 자신의 삶에 대한 확인이며, 그의 사람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당화 시켜주는 진리이다. ‘그를 정당화 시켜주는 그 새벽’과 함께 그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서 이제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된 이 세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사랑을 느끼고 세계와의 우주적인 결합을 하기에 이른다. 그가 사형을 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행복의 소리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작가소개

알베르 카뮈 

 

1913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몽드비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알사스 출신의 농업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1차 세계대전 중 전사하고, 청각 장애인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가난 속에서 자란 카뮈는 유년 시절의 기억과 가난, 알제리의 빛나는 자연과 알제 서민가의 일상은 카뮈 작품의 뿌리에 내밀하게 엉기어 있다. 구역의 공립 학교에서 L. 제르맹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나는 자유를 빈곤 속에서 배웠다.”라고 하기도 했는데, 알제리에서 보낸 유년기는 그가 작가적 양분을 공급받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고 1923년 프랑스 중등학교 리세에 입학했고, 이후 알제리 대학에 입학했으나 1930년 폐결핵으로 자퇴를 했다. 결핵 발병으로 누구보다 좋아했던 축구를 포기했다. 1942년 7월 존재의 부조리성(不條理性)을 다룬 《이방인(異邦人, L’?tranger)》과 동일한 주제를 철학적 에세이로 풀이한 《시지프 신화(神話)》를 발표하면서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고, 이어 《페스트》(1947)의 출간으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1951년에는 마르크시즘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평론 《반항하는 인간》을 발표하여 사르트르를 포함한 프랑스 문인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57년 마흔네 살의 젊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카뮈는 장편소설 《최초의 인간》 집필 작업에 들어갔으나, 3년 후인 1960년 자동차 사고로 생을 마쳤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표리(表裏)》(1937), 《결혼》(1938), 《정의(正義)의 사람들》(1949), 《행복한 죽음》, 《안과 겉》, 《적지와 왕국》, 《전락(轉落)》(1956), 희곡 《오해(誤解)》(1944)와 칼리굴라(Caligula)》(194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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