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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T. S. 엘리엇의 황무지 <2편>

북리뷰

by 연우23 2023. 1. 17.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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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사


4부의 첫 행은 플레바스라는 이름으로 시작되는데 이 인물은 1부에서 소소스트리스 부인의 카드에 나타난 페니티아의 수부이다.


이것 보세요. 그네가 말했다.
여기 당신 패가 있어요. 익사한 페니키타 수부군요.


이 수부는 수사에서 익사의 운명을 완수하고 있다. 이러한 운명은 고립되어 있는 현대인에게 죽음을 통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엘리엇에게 비전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빛으로 향하는 상승의 비전이고 하나는 어둠으로 향하는 하강의 비전이다. 그러나 이 상승과 하강은 종래에는 같은 것으로 양자가 모두 구원으로 행하는 다른 방식의 길이다. 사수에서 플레바스는 어두운 하강의 길로 향하고 있지만 시인은 "플레바스의 죽음을 통해 우리 인간의 삶의 여정이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암시하는 동시에, 이 죽음이 새로운 시작이라는 구원의 비전을 어둠을 통한 부정적인 방법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페니키아 사람 플레바스는 죽은 지 2주일
갈매기 울음 소리도 깊은 바다 물결도
이익도 손실도 잊었다.
바다 밑의 조류가
소근대며 그의 뼈를 추렸다. 솟구쳤다 가라앉을 때
그는 노년과 청년의 고비들을 다시 겪었다.
소용돌이 휩쓸렸다.
이교도이건 유태인이건
오 그대 키를 잡고 바람 부는 쪽을 내다보는 자여
플레버스를 생각하라, 한 때 그대만큼 미남이었고 키가 컸던 그를.


엘리엇은 앞서 3부 불의 설교에서는 정욕으로 불타는 황무지를 그렸지만 이곳 4부에서는 대조적으로 물에 의한 정화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불이 정화와 정욕이라는 상반된 의미를 포함하듯이 물도 또한 재생과 파멸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플레바스는 일주일 만에 부활하지 않고 이주일이나 죽어있으며 결국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플레바스가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하강은 앞서 언급한 어둠의 비전과 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플레바스가 비록 재생에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윤회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 그 정점인 죽음을 통하여 구원의 길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길은 엘리엇의 "회전하는 세계의 정지점"과 같은 길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회전하는 바퀴의 원주는 물질세계의 변화와 일시적 유전에 좌우되고, 바퀴의 중심인 정점은 절대적인 대상의 세계로서 영원의 세계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엘리엇의 사수에서 표현하고 싶어 하는 사실은 시간이라는 바퀴의 세계에서 소외와 고립으로 고통 받는 플레바스와 같은 피조물들이 정신적인 구심점인 바퀴의 정점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가능성인 것이다. 이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육으로 죽어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3. 천둥이 한 말


5부 ‘천둥이 한 말’에서 시인은 지금까지 살펴 온 현대사회의 기계적 문명에서 파생된 희망도 목적도 없는 삶과 성적 타락에 대한 구원의 가능성을 확언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천둥의 목소리로 구원의 길을 제시하면서 섭리를 통해 심판받는 인간의 운명을 나타낸다. 먼저 5부의 시작은 성배를 탐색하는 아더왕과 그 기사들의 이미지를 제시하면서 "After"라는 시어를 문두에 제시하는데, 이 시행들은 인간의 고난의 길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아우성 소리와 울음소리, 그리고 천둥"의 소리를 반향시키면서 혼돈으로 가득한 황무지의 인간들에게 구원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땀 젖은 얼굴들을 붉게 비춘 횃불이 있은 이래
동산에 서리처럼 하얀 침묵이 있은 이래
돌 많은 곳의 고뇌가 있는 이래
아우성 소리와 울음 소리
옥과 궁궐
먼 산을 넘어오는 봄 천둥의 울림


이렇게 구원의 필요성을 열거한 위의 시행 중에서 “땀에 적은 얼굴들을 붉게 비춘 횃불”과 “동산에 서리처럼 하얀 침묵”은 우리에게 아더왕과 그의 기사들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리스도와 교수형 당하여 죽음을 맞이한 신화 속의 여러 다른 신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신은 죽고 없다.


살아 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살아 있던 우리는 지금 죽어 간다.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


시인은 현실에 뿌리를 두고 안주하는 황무지 주민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이는 언제나 완전한 구원이 아니라 구원의 희망만을 암시하고 있다. 즉, 바위가 있으면 물이 없고, 물이 있으면 바위가 없는 것이다.


여기는 물이 없고 다만 바위뿐
바위 있고 물은 없고 모랫길 뿐


그리하여 구원의 "비를 머금지 않은 건조한 볼모의 우렛소리만"이 존재한다. 이어서 시인은 우리의 곁에서 갈색 머리를 싸맨 채, 갈색 망토를 걸치고서 항상 길을 가고 있는 인물을 내세운다.


당신 옆엔 언제나 또 한 사람이
갈색 망토를 휘감고 소리 없이 걷고 있어,
두건을 쓰고 있어


황무지에서 갈색은 황무지 고유의 색이며, 이 갈색의 망토를 두른 인물은 전형적인 황무지적 의식구조를 지닌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인물은 퇴폐한 황무지에서 황무지 주민들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이 길은 다음 행에서 보여주듯이 대기를 가득 채우는 "어머니의 탄성소리"가 나타나는 비운의 길이지만 성모 마리아와 같은 어머니의 이미지로 구원
의 가능성이 함축되어 있는 길이다. 그렇지만 이 길은 환상의 길이며, 따라서 이 길을 싸고 있는 도시는 보들레르의 비실재의 망령의 도시이며 단테의 지옥의 도시이다.


다음 연에서는 황무지의 황혼의 장면을 통해서 기사의 환상과 "위험당"에서 겪는 시련을 묘사한다. 박쥐가 날개치며 어둠 속을 나는 죽음의 이미지와 공중에 거꾸로 매달린 교회의 탑은 종교의 파멸을 의미하고, 그곳에서 나오는 종소리는 붕괴하는 인류를 회상하는 종소리이다.

 

 


공중에 탑들이 거꾸로 서 있고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종을 울린다. 시간을 알렸던 종소리
그리고 빈 물통과 마른 우물에서 노래하는 목소리들


산중에 이렇게 부패한 웅덩이와 연못에 달은 희미하게 빛을 내리고, 무성한 숲에서 풀이 노래하는 이곳에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위험당이 있다. 이곳은 구원의 바람만이 방문하는 곳으로 창문도 없다. 오직 바람이 자유롭게 스며들 수 있는 문만이존재한다. 이곳의 지붕 마루에서 수탉이 번개 같은 섬광으로 "꼬꾜 꼬꾜 꼬꾜"라고 울 때 비를 몰아오는 축축한 바람이 불어온다. 즉, 성배탐색의 절정의 순간에 시는 자연스럽게 천둥소리와 연결되고 다시 한 번 황무지에 구원의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다음은 인도의 갠지스강으로 시의 무대가 옮겨지고 신의 심판의 목소리처럼 "따"라는 우렛소리가 세 번 울린다. "따"는 Datta(주라), Daydhvam(동정하라), Damyata(자제하라)를 암시하기 위해 쓰인 천둥소리의 의성어이다.


<다타(주라)> 우리는 무엇을 주었던가?
친구여, 내 가슴을 흔드는 피
한 시대의 사려분멸로도 취소할 수 없는
한 순간에의 굴복, 그 엄청난 대담,
이것으로 이것만으로 우리는 존재해 왔다.


이 "주라"는 첫 번째 명령의 목소리는 이기적인 인간들에 대한 질타의 목소리이다. 신중한 분별력을 강조하는 이 목소리는 우리에게 자아를 뛰어넘는 과감한 희생을 요구하는데, 이 희생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인간의 삶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목소리는 참다운 인간관계에 필요한 "동정"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야드밤(공감하라)> 나는 언젠가 문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단 한 번 돌아가는 소리
각자 자기 감방에서 우리는 그 열쇠 생각한다.
열쇠를 생각하며 각자 감옥을 확인한다.


천둥의 두 번째 목소리는 고립된 자아에 대한 가르침이다. 자신의 육체라는 감옥에 홀로 유폐된 소외된 자아는 타자에 대한 인식을 시작으로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는 사실을 설파하고 있다. 위의 "열쇠"는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립된 황무지 주민들에게 자아 극북의 길은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세 번째 목소리는 "자제"의 명령이다. 이 자제의 명령은 신에 대한 겸양을 가르치고 있는 바, 유폐된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난 인간에게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알리며 참다운 인간관계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담야타(자제하라)> 보트는 경쾌히
응했다. 돛과 노에 익숙한 사람의 손에.
바다는 평온했다. 그대의 마음도 경쾌히 응했으리라
부름을 받았을 때, 통제하는 손에
순종하여 침로를 바꾸며


이와 같이 "주라, 동정하라, 자제하라"는 목소리는 위험당으로 향하는 기사로 대변되는 고립된 인간을 향한 구원의 목소리이다. 결국 이 목소리는 개인에서 벗어나 사회, 그리고 신으로 향하라는 사랑의 목소리라 할 수 있겠다. 이제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메마른 평야를 등지고 물가에 앉아 낚시를 하는 전경을 보여준다. 이는 시인의 의식을 다시 한 번 어부왕의 의식과 동일시하고 무너져가는 시인 자신의 시대를 구원하고자 하는 의식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기숡에 앉아
낚시질했다. 등뒤엔 메마른 들판.
적어도 내 땅만이라도 바로잡아 볼까?
런던 교가 무너진다 무너진다.


무너져가는 런던교를 보며 시인은 "최소한 자신의 땅이나 정돈할까?"라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하지만 소극적인 자세를 케너는 "우리가 비록 전 세계를 정돈할 수는 없지만 우리 자신을 교정할 수는 있으며,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일지라도 우리의 능력 안에 놓여진 질서는 바람직한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3행에서 시인은 연옥편의 26장을 인용하면서 지상에서의 고뇌를 말하며 속죄의 희망을 흐느끼며 노래한다.


<그리고 그는 정화하는 불길 속에 몸을 감추었다>
<언제 나는 제비처럼 될 것인가> - 오 제비여 제비여
<황폐한 탑 속에 든 아퀴텐 왕자>


위의 불은 죄를 사하는 정화의 불로, 이 정화의 불을 향해 능동적으로 향하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토마스 키드의 스페인 비극의 등장인물인 히에모니모를 등장 시켜서 시인의 목적에 대한 결의를 보여준다.


이 단편들로 나는 내 폐허를 지탱해 왔다.
분부대로 합죠 히에로니모는 다시 미쳤다.


히에로니모는 자신의 적자인 호레시오를 살해한 자들에게 복수하지 위하여, 그 살해자들이 연출하는 연극에 기꺼이 출연할 것을 밝히면서 “분부대로 합죠”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목적은 여기서 자신이 히에로니모의 입장이 되어 황무지 주민들이 연출하는 황무지 같은 삶에 미친척하고 동참하겠다는 심정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히에로니모는 다시 미쳤다”라는 말로 현대의 황무지에서 히에로니모가 된 자신의 심정을 아이러니컬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마지막으로 구원을 바라는 일념으로 황무지의 인간들에게 "Datta(주라), Daydhvam(동정하라), Damyata(자제하라)"를 다시 한 번 외치는 동시에, 전 인류를 향하여 "샨티, 샨티, 샨티(평화)"를 기원하며 언젠가는 다가 올 구원을 염원하고 있다.

 

<황무지 1편 바로가기>

 

 

작가소개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T. S. 엘리엇)

 

저자 T. S. 엘리엇은 시인이자 극작가, 문학 평론가. 1888년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의 부유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과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였고 프랑스 소르본대학교와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유럽 문학을 더 깊이 공부했다. 1914년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에즈라 파운드를 만나 이듬해 등단한 이후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해 1917년 첫 시집 『프루프록 및 그 밖의 관찰』을, 1922년에는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구절로 잘 알려진 대표작 「황무지」를 발표하며 전 세계 문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연극적인 요소를 가진 극시와 평론 등 다양한 장르와 새로운 기법을 선보이며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극시들은 연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특히 『주머니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고양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캐츠」는 1981년 초연 이후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뮤지컬로 꼽힌다. 현대 영미 문학에 큰 영향을 준 공로로 1948년 메리트훈장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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