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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삼국시대의 문학 : 고구려, 백제, 신라

북리뷰

by 연우23 2023. 1. 2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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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속 삼국시대 지도

 

삼국시대의 문학은 신라의 문학을 제외하고는 자료가 얼마 남아있지 않아 그 시대의 특색을 살피기가 어렵다. 삼국시대는 외부의 침략이 잦아 문화회손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의 수용과 한자의 수용이 일어났으며 지식인 계층의 문학이 전개되던 맹아기였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일을 겪음으로서 그에 따른 문학들이 많은 발전을 했으리라는 짐작을 가지고 삼국시대 문학의 전반적인 특징과, 삼국 각 나라의 문학의 특징, 그리고 그 문학의 특성에 따라 국민적 특성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또한 그들이 후대의 문화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도 알아보겠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삼국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자면


3국이 각기 건국 초기의 부족국가적인 틀에서 벗어나 고대 민족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때부터 고구려·백제가 멸망하고 통일신라시대가 개막되기까지의 시기이다. 3국은 108년 중국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고지에 둔 한사군의 세력이 강원도와 충청남도의 일부에까지 미치자 이에 눌려 긴 정체기를 보냈다. 313년 고구려가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을 차지하고 이어 대방군 등 한반도에 깊숙이 뿌리 박았던 중국 세력을 몰아내면서 3국은 세력 신장(伸張)을 위한 각축(角逐)에 들어갔다.


3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을 차지한 직후부터 마찰을 일으켜 369년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백제의 치양을 침범하면서 본격적으로 층돌하게 되었다. 반격에 나선 백제 근초고왕의 태자 근수구는 더 북진하여 수곡성까지 이르렀고 이후 백제의 세력은 옛 대방지방을 석권하고 371년에는 평양성을 침공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하게 하는 등 양국은 깊은 적대관계에 빠지게 되었다. 신라는 백제가 369년 마한을 통일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해가는 동안에도 가야 제국과 왜인의 세력에 눌려 어려움을 겪다가 눌지왕(재위 417∼458) 때에야 낙동강 동안의 여러 소국을 병합하여 서진을 시도하지 못하다가 450년 신라가 고구려의 변장을 살해함으로써 양국관계는 악화되어 신라는 자주 고구려의 침범을 받게 되
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 의해 옛 대방땅을 빼앗긴 데 이어 475년에는 국도인 한성을 빼앗기고 남천하여 수도를 웅진으로 옮겨야 하였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한동안 그 판도가 아산만에서 조령·죽령을 지나 평해에 이르는 선으로써 백제·신라와 국경을 이루어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신라·백제의 동맹으로 남진이 저지되고 551년 이후에는 양국이 공격의 주도권을 잡아 신라가 죽령 이북의 10군을 빼앗고, 백제가 한성 및 남평양 등 6군을 수복하여 잠시 호각세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553년 신라
에서 백제가 수복한 남북한성 등을 탈취하여 신라·백제의 동맹관계는 깨어지고 이로부터는 신라의 국세가 급상승, 이제는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을 맺어 신라와 대항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수.당 등 북으로부터의 침략을 물리치는 한편, 백제와 번갈아가며 신라를 공략, 신라와 당나라의 연락로를 차단하는 등 신라를 고립상태로 몰았다. 이에 신라는 당에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동맹관계를 맺고 그 힘에 의지하여 660년에는 백제,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기에 이르러 삼국시대는 동족의 공존(共存)이라는 민족의식의 싹을 보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삼국시대는 부족국가로서 출범한 이들 나라가 원시적 국가체제에서 벗어나 그 성장 과정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한 철기문화를 소화하여 철제 농기구 사용의 일반화로써 농경생활
을 확립시켰고 정치제도를 제정·정비함으로써 고대국가가 형성된 시기였다. 또한 불교가 전래 확산되어 유교윤리와 더불어 후대 정신문화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대륙문화를 흡수,재창조하여 선진문명국의 위치를 굳힌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삼국문학의 전반적인 특징으로는 문학의 한자표기에 있다. 나라가 생겨남에 따라 나라통치를 위함과 말에서 기대어 할 수 없는 정확성을 확보하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전달을 하자면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를 나타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문명이 일어난 곳이면 어디든지 글자를 사용했는데, 물론 처음이야 간단한 글자나 부호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발전된 중국에서 한자를 가져오는 편이 유리하리라 생각해서 우리의 기록방식을 발전시키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말을 그대로 나타낼 수 없어서 불편했기에 고쳐서 쓰는 방식을 연구 해야만 했다. 한자가 수용된 시기는 확실히 말 할 수는 없지만 수용시기보다는 이용여하가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건국 초 이른 시기에 이미 한문을사용해 100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역사책을 편찬했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능력은 고구려에서 키웠다기 보다는 고조선의 유민이 지니고 있었다고 본다. 신라는 한문 채택이 가장 늦었는데 지체가 낮아도 계산 할 줄 알고 한자를 안다면 등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공동의 한문을 우리 발음대로 읽는데 만족하지 않고 한문문장과 우리말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을 거듭하기도 하였다. 이런 모든 정황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한자의 사용은 우리의 문학사에 있어서 필수적 구실을 해와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삼국의 초창기의 문학은 작품으로서의 의미보다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시작 되었다고 할 수있다. 글을 이용해 통치제도를 정비해 안정을 얻고 중요한 일을 기록해 올려 널리 알리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효율적인 방법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인데, 여기서 건국서사시를 기록하게 되며 기록문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많은 국사를 편찬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의 국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국사편찬에 종사한 사람을 태학박사 또는 박사라고 했고 신라에서는 문사하고 했다. 이들은 군사귀족이 아닌 문신이었는데 그 직위와 제도가 보장되었으며 신라에서는 나아가 고급문학 담당자 노릇을 하였다. 이는 실무 기술적인 면에서나 소용되는 글이었고 이념적 표현 이거나 문학적 창작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시작이 정치적이었다고 해서 발전 또한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신라나 백제의 가요와 고구려의 설화가 그러한데 기념비적인 존재로서의 영웅을 노래하고 이야기하기도 했지만같은 영웅일지라도 개인으로서의 영웅의 부귀와 영달 또는 기쁨이나 슬픔을 노래하였으며 되도록 평범한 필부나 촌녀의 기쁨이나 슬픔을 노래하였다.


(1)고구려의 문학


고구려는 지리적인 조건 등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가장 잦았고 삼국 중 가장 오래된 나라로 국립교육기관에서 한자와 중국 고전을 가르쳤다. 고구려는 서사문학이 발달하였는데,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의 역사를 편찬한 <유기>가 있고 그것을 뒤에 태학박사 이문진이 <신집>으로 수정하였다. 또한 뛰어난 군주임을 자랑하며 백성을 위하는데 상대방보다 앞선다고 널리
선전하기 위해 돌에다 글을 새긴 비를 만들었는데, <광개토왕릉비><중원비>가 있다.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의 기풍을 잘 나타내어 그 찬란한 문물을 짐작케 하고 있다. 이 비문은 현존하는 문학작품 중 연대가 가장 확실한 최초의 것으로 건국서사시 다음단계의 문학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던가를 아는 데 소중한 자료이다. <중원비>는 고구려가 한강을 넘어서
남쪽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신라를 아우의 나라고 삼은 것을 계기로 해서 세웠고, 두 나라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서술하는 것을 내용으로 삼은 것인데 여기에는 이두식 표기가 보인다. 고구려는 일찍이 낙랑군을 쳐 없애고 여러 나라와 싸우면서 국력을 신장 시켰기 때문에 사대외교를 택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외교문서를 대신해 수나라 장수의 허세를 조롱하는 을지문덕의 <여서장우중문시>가 남아있다. 이는 남아있는 최초의 한시이다. 또한 고구려는 지배체제가 정비되어 가는 과정에서 상층의 나라굿과 백성의 민간굿이 분리되었다. 상층의 문화로 악이 생겨났는데 악은 기악연주 무용 성악가창을 아우른 종합적인 공연이면서 통치 체제를 상징하고 나라의 위엄을 자랑하며 대외적으로는 문화수준을 드러내고 안으로는 백성
을 감복게 하는 것으로 춤위주냐 노래위주냐에 따라 무악과 가악으로 구분되었다. 질서유지가 특히 중요한 구실이었으므로 예악이라고 했다. 그러나 불행이도 당(唐)나라의 장수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그 고도의 문물에 놀라 모든 전적(典籍)을 불살라버려 고구려악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고려 때 궁중악으로 채택되었던 삼
국속악 가운데 고구려 것이라 하여 노랫말 없이 유래정도만 적어놓은 <내원성><연양><명주>이 있고 작품이 전해지는 것은 황조가 하나이다.


<내원성>은 정주(靜州) 물 가운데 있는 성 이름인데, 오랑캐가 귀순하면 머무르게 한 성으로, 이를 기념하여 지은 노래이다. 그 지방은 통일신라 영토가 아니었으므로 고구려때 궁중악으로 채택된 뒤에 통일신라로 전해졌다고 보는 것이다. <연양>은 어떤 사람이 남에게 쓰이는 바가 되어 죽기를 무릅쓰고 열심히 일하다가 자기의 신세를 나무에다 비해서 노래한 것이다. <명주(溟州)>는 지금의 강릉인 지역 이름을 노래 제목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노래도 앞의 노래들과 같고 시련을 극복하고 사랑을 성취한 노래이다. 이 외에도 만주와 한반도에 걸치는 웅대한 판도를 개척하던 고구려인의 기개는 웅혼(雄渾)하고 동적(動的)인 서사문학을 탄생시켰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건국 신화 이외에도 <유리왕전설> <온달(溫達) 설화> <미천왕(美川王) 설화> <호동왕자(好童王子) 설화> 등의 여러 전설·설화를 형성하였다.


(2)백제의 문학


백제는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중국의 육조의 문물에 자주 접할 수 있어서 한문학의 수준이 높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백제문학은 삼국이 통일됨에 따라 패국이었기 때문에 문학을 남기기는 어려움이 많았다. 오히려 일본에 영향이 많이 남아있다고 할 정도로 현존하는 문학 자료가 얼마 없다. 일본과의 교류는 활발 하였는데 554년 일본에 가서 음악을 가르치던 백제인 악사들선․후임자 가 교대를 했다는 기사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보인다.또한 왕인(王仁)은 일본에 처음으로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를 전해주어 그들의 한문학을 일으키는 역할도 하였다 백제는 375년에 박사 고흥이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 했다고 전해지며 그밖에도 <백제기><백제본기><백제신찬>등도 있었다고 한다. 남겨진 비문으로는 나라의 위엄이 나타난것은 있지 않으나 신통하게도 <사택지적비>라는 것이 전한다. 부여읍내에 발견되었는데 지나칠정도로 대우법에 충실한 변려문의 특색이 뚜렷이 드러나서 난숙한 경지에 이르른 백제 말기의 문학이 화려한 수식위주의 미문취향을 지니지 않았던가 하는 추측을 자아낸다. 비문은 적게 남긴 백제가 외교문서를 작성하는데는 열을 올렸다. 5세기에 북위의 효문제에게 장문의 국서를 보내는데 이글은 사대외교의 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악 또는 예악은 이루어진 과정이나 모습이 고구려와 비슷하다. 그러나 백제는 고분벽화의 주악같은 것을 남기지 않았다. 오직 <고려사>악지에 소개되어 일부의 역사만 알 뿐이다. 5편의 노래가 전해지고 있는데 산이름 제목이 4편 여성이 지어부른 것이 4편인 것이 특이하다. <무등산>은 그산에 성을 쌓자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한 노래이다. <지리산>은 백제왕의 폭정을 구타한 노래이며 <방등산>은 신라 말에 있었던 사건으로 도적에게 잡혀 간 여자가 자기 남편이 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을 풍자한 노래이다. <선운산>은 남편이 부역을 나갔다가 기한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아내가 산으로 올라가 기다리며 부른 노래이다. <정읍(井邑)>은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면서 부른 노래라는 점에서 <선운산>과 다름이 없다. 백제의 시가에서 주목할 것은 정읍인데, 그 가사가 악학궤범에 정읍사라는 제목으로 노래말이 남아 있다. 형식은 한 줄이 두 토막씩이고 모두 여섯 줄인데, 다시 두 줄씩 합쳐 보면 네 토막씩 석 줄의 형식이어서 시조의 형식과 상통한다. 이런 형식이라면 우리노래의 기본형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밖에도 대표적인 설화로는 도미와 아내가 당한 수난이야기 <도미전>이 전해진다. 이렇듯 백제는 아름답고 평화로은 노래를 많이 담았고 서정적인 문학이 많이 융성하였다.


(3)신라의 문학


문학 작품 또한 아름다운 서정문학인 시가가 발달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 가로막혀 중국의 영향을 받아드리는데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오히려 고유문화와 외래문화를 서서히 융합시키는 작용을 하여 가장 높은 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신라는 545년 거칠부가 문사를 널리 모아 국사를 편찬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남겨진 비문으로는 <적성비>와
진흥왕이 세운<순수비>로 <창녕비><마운령비><황초령비><북한산비>가 있다. 적성비에서는 한문보다 이두적표현이 많지만 순수비에는 이두식표기가 고유명사에 쓰이는 정도로만 줄어들어 나타난다. 나라의 위업을 자랑스럽게 선포하는 위엄을 갖추기 위해서는 온전한 한문으로 지은 비문이 적합하다고 생각한 듯 하다. 유리왕 5년에 지어진 <도솔가>는 가악의
시작이었는데 이는 나라를 편안하게 하자는 주술 또는 기원을 곁들이면서 국가적인 질서를 상징하는 서정시이다. 노랫말은 전해지지 않지만 연대가 확실하고 짓게 된 동기가 확실해 문학사적 전환의 아주 중요한 국면을 알아 볼 수 있기에 중요한 자료이다. <삼국사기>에는 <희소곡>이 소개되었는데 여자들이 길쌈경쟁에서 불려진 노래이다. 본래는 무.곡.가를 포괄
한 개념이 악 이었으나 3세기 초에 와서 분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물계지가>는 자신의 충효를 알아주지 않는 부당한 처사를 원망한 노래이다. 눌지왕의 <우식곡>은 일본에 볼모로 붙잡혀 있던 아우가 귀국하자 잔치를 베풀어 지은 것인데 개인의 감정을 나타내는데 그치지않고 나라의 위기극복을 널리알리는 사연을 지녔기 때문에 예악에 편입되었다. 신라의 궁중 예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용이 풍부해졌고 안으로 통치체계를 재정비하고 밖으로 국토를 크게 넓힌 시기에 이르자 문화수준을 자랑하고 나라의 위엄을 드높이기 위해 면목을 일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6세기 중엽 진흥왕은 우륵에게 가야금으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게 하였다.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지은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은 비록 당나라의 환심을 사기 위한 굴욕적인 송시(頌詩)이기는 하나 운치가 깃들인 주옥같은 내용으로 신라 문학의 높은 수준을 엿보게 한다.신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화랑들의 문학인데 신라의 주 작가층이 승려와 바로 화랑들이다. 가악을 숭상하던 화랑의 등장은 후일 향가문학이 성립되는 요람구실을 하였으며<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미 고신라시대에 4구체의 향가로<서동요(薯童謠)> <혜성가(彗星歌)> <풍요(風謠)> 등의 작품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것은 민족적인 통일국가를 이룩해 놓았다는 정치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단일(單一)한 고유문화를 처음으로 형성시켰다는 문화적 측면에서도 그 의의는 크다. 그 때까지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을 견제하기에 여념이 없던 신라의 국력은 이제 그 힘을 안으로 돌려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게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때마침 황금기를 맞이하던 당나라의 문학은 신라에 큰 자극을 주어 신라 조정에서는 해마다 많은 견당(遣唐) 유학생을 중국에 파견하여 난숙한 한문화(漢文化)를 흡수·수용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미 전대(前代)에 전래되었던 불교는 이제 확고한 자리를 굳혀 신라의 귀족층을 형성한 승려나 화랑의 정신생활을 지배하고 예술 활동의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무르익은 문화적 환경 속에서 나타난 것이 이두(吏讀)와 그것을 표기수단으로 하는 향가문학이다. 설총이 생존한 시기를 전후하여 정리·종합된 것으로 보이는 이두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한국말을 표기하도록 만든 일종의 차자문자(借字文字)로서, 이 이두문자의 창안(創案)으로 한국 고유의 향가문학이 이루어지고 그것은 한국문학에서 완전한 문학으로 최초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향가는 우리말로 된 최초의 기록문학이고, 또한 개인 창작시라고 할 수 있다. 888년 위홍과 대구화상이 역대의 향가를 모아 <삼대목>이라 했다는 책을 편찬하였다는 말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현존하는 향가는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가 전해 오고 있다. 향가가 지어진 최고(最古)의 연대는 진평왕대(眞平王代) 이전이며, 아래
로는 헌강왕대(憲康王代)에 이르는 280여 년 간에 걸쳐 작품이 분포되어 있다. 향가는 국선지도(國仙之徒)가 지어 부르는 것으로 악기 반주는 없었으며 사설이 중요했다. 사설이 중요하다는 것은 뜻하는 바가 예사롭지 않아서 무언가 신이한데가 있고 주술적 힘을 지니기도 했다는 말이다. 향가를 4구체 8구체 10구체로 나누는데, 기본형식인 4구체를 두줄 형식으
로 보고 8구체는 이를 거듭해 넉줄이 된것이고 10구체는 ‘아으’라고 해석될 수 있는 감탄사를 넣어 다섯줄의 형식이 되는 것이다. 이 5줄 형식의 향가를 사뇌가라 부르는데 이는 민요와 다른 형식에 속한다. 이는 신라 귀족 문화가 사상적인 수준을 갖추어 세련되는 단계에 이르러 개인 창작의 서정시가 된 것으로 화랑의 사상을 정신적인 내용으로 하고, 거기에 불
교를 보탰으며, 화랑의 무리에 속한 주술사이자 승려인 지도자가 시인 노릇을 하며 주로 창작한 것이다. 사뇌가가 처음 나타난 시기는 자료에 의해 6세기 말이라 할 수 있고 잔존 형태라 하는 <도이장가><정과정곡>을 고려하건데 12세기경까지 계속되었다.


4구체 향가로는 <서동요> <풍요> <헌화가> <도솔가>가 있고 8구체 향가로는 <처용가> <모죽지랑가> 10구체 향가로는 <혜성가> <원가> <제망매가> <찬기파랑가> <안민가> <도천수비대가> <우적가> <원왕생가>가 있다. 이 중 4구체와 8구체의 경우는 민요의 정착으로 본다. 이는 당시에 식자층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식자와 서민층의 노래가 크게 나뉘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4구체를 기본형이라 한다면 8구체는 사람의 생각과 느낌이 복잡해지면서 4구체에서 그 곱이 되어 8구체로 발달되었다고 본다. <처용가(處容歌)>는 후대에 윤색·첨가되어 조선시대의 궁중가무로 이어졌다.10구체는 현전하는 25수 중 19수로 가장 많고 세련된 수사와 투철한 시 정신이 있고 더욱이 제 9행의 낙구 또는 감탄사가 있어 시상의 압축을 의도하고 있는 정형적 서정시여서 그 창작성을 높이 평가한다. 또한 10구체 향가는 후대에 많은 시가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삼국 중에서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에 비해 환경이 농경평야가 아닌 유목이 가능한 평원이었다. 그래서 유목민특성을 가지고 부여어를 썼다. 부족공동체였는데 농사를 쉽게 지을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해서 약탈을 일삼아 생명유지를 해왔다. 중국 대륙과 직접 접속하고 있는 고구려는 민족 이동 초기에 한반도를 개척하여 들어왔던 족속의 기상을 물려 받았고 그들의 지역적특징 때문에 웅혼하고도 용감한 남성적인 서사 문학을 즐겨 창조했다고 보인다.한편 한반도의 서남에 자리 잡았던 백제는 지배층과 피지배계층이 다른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건국신화부터 고구려 주몽의 아들이 세운 나라라고 되어있는 것과 같이 백제 자체는 과거 삼한으로 알려진 부족집단을 북쪽에서 내려온 세력들이 통합하여 지배층을 이루고, 또한 그 지배층들이 상당히 열린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까닭에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까지 넓은 교류를 해 왔다. 그래서 유목민족과 토착농경민족의 이중문화가 발달하였다. 백제의 이러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괴리성때문에 그 멸망이 쉽게 다가왔다고도 보고 있다. 언어도 역시 북방어와 남방어의 이중생활을 했으며 온화한 기후와 풍양한 풍토 위에 낙원을 꾸며 만족한 생활을 누리면서 주로 서정적인 방면에 능한 재능을 길러 완만하고 부드러운 여성적인면을 지니면서 화려한 문학을 발전시켰다. 신라역시 백제와 마찬가지로 농경평아를 가졌고 남부 한족어를 사용하였다. 다른 점이라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가로 막혀 중국 대륙의 문화를 직접 받아들이는 데 불편한 지리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어 굉장히 폐쇄적인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폐쇄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개화가 더디었으나 상대적으로 덜 타락한 상류층에 의한 강력한 중앙 집권력과 불교가 가져다준 정신통일이 결국 삼국통일을 이루게 하였고 그 불교적 성격이 문화를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문학에서도 불교적 작품을 많이 만나 볼 수 있으며 그 작품들은 섬세한 서정적 문학성을 띄고 있다.


이처럼 환경에 따라 나라의 체제에 따라 국민들의 특성이 달라지고 환경 종교 문화등의 영향을 많이 받는 문학의 특성까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서로 밀접하게 붙어 있으면서 문화의 교류가 있으면 서로의 문학을 배우기도 하고 전파가 되어 비슷한 점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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